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 아이콘 또는 HTTPS 확인하기

    웹 브라우저의 주소 입력창에 표시된 자물쇠 아이콘과 주소 앞 https://가 있는지 체크하여 보안적용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세요.

고용노동부

국민 누구나 원하는 일자리에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는 나라!

제목
전통 한과의 대중화·세계화 일등공신이 되다
등록일
2016-07-22 
조회
1,163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합니다. 쌀 한 가마니의 양은 400만 톨이고, 유과 한 개에는 쌀 22톨이 사용된다는 것 등 세밀한 부분까지 연구할 정도로 미쳐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열정을 갖고 전문성과 기술력으로 승부하면 반드시 성공이 따라올 것입니다.”

 고용노동부(장관 이기권)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사장 박영범)은 한과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헌신해 온 신궁전통한과의 김규흔 대표(만 60세)를 7월「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선정했다.
  
대한민국명장인 김 대표는 35년간 전통 한과를 만들어온 기술인으로서 국내 유일의 한과문화박물관을 개관해 한과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는 농산물 가공산업 분야의 선각자이다. 
 
또한, 한과의 신제품 개발 및 생산 공정 자동화, 품질 개선 등의 노력으로 매출 40억원대의 회사로 성장시키는 한편 새로운 포장기술 개발로 국내 한과시장 규모를 2,000억원대로 끌어올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운명처럼 시작된 한과 제조 35년 외길 인생

 김규흔 대표가 한과 제조를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은 아내를 만나면서부터다. 1970년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는 세 들어 살았던 집 주인으로부터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았는데 그녀는 만날 때마다 약과를 조금씩 가져다주곤 했다. 그 약과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준 한과 맛이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오늘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 때 당시 아내의 형부가 한과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형부의 동생이 군대를 가게 되자 제게 공장 일을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공장 관리자로 시작했고 기회가 되면 어린       시절 맛봤던 한과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2년여 간     공장에서 한과를 배웠고 그 꿈을 이루고 싶어서 독립했죠.”

 1981년, 한 제과 공장의 15평 정도 공간을 빌려‘신궁제과’라는 브랜드로 출발했다. 한과 제조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주문도 늘어났고 7년 후에는 의정부에 어엿한 공장을 설립했다. 이후 늘어나는 주문을 맞추기 힘들자 원 없이 한과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포천 공장으로 확장 이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걸어온 길은 협소하고 걸음은 달팽이처럼 더뎠습니다. 운명처럼 시작된 한과와의 만남으로 외길 인생을 걷게 되었고 그 길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뛰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3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명인, 명장이라는 과분한 타이틀을  얻었지만 저는 그저 한과를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한과를 맛볼 수 있게 노력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끊임없는 신제품과 신기술 개발

김 대표는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라는 신념으로 끊임없는 신제품과 기술을 개발하며 최고의 명품 한과를 만들겠다는 ‘열정’과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는 ‘변화’로 성공 신화를 만들어 갔다.
  “한과 제조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경쟁업체들을 이기기 위해선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신념으로 꾸준하게 새로운 한과들을 개발했어요. 우리나라 한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모두 제가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때 한과류 협력업체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과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세계인이 좋아하는 재료인 초코를 활용하면 전 세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과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퓨전 한과인 ‘초코한과’를 개발했다.
 
또한 밀가루 약과만 있던 1990년대에 3년간의 연구 끝에 쌀 약과를 개발하는데 성공, ‘쌀 이용 신기술 특허’를 획득하는 등 총 5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인삼·녹초 유과, 키토산 유과, 모자이크 깨강정, 금귤정과, 녹차약과, 인삼유과, 단호박약과, 쏙쏙이유과 등 현재까지 170여종의 기능성 한과를 개발했다.
 
김 대표의 한과가 최고의 맛을 내는 비결은 그의 제작 노트에 있다. 한과 제조를 시작하면서 써온 노트에는 그동안의 한과 제작 상황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내일이 약과를 만드는 날이라고 하면 제작노트 3년 치를 꺼내서 확인합니다. 약과를 만들 때의 온도와 습도가 어땠는지, 어떤 레시피로 만들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등 3년 치 기록을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내일의 날씨를 감안한 레시피를 조정해 나가는 것이죠.”

 김 대표는 한과의 저장기간이 너무 짧다는 단점을 포착, 새로운 포장기술을 개발하여 3개월에 불과했던 유통기한을 1년까지 연장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지난 2000년 한과업계 최초의 벤처기업으로 선정되었고, 2001년에 농림식품부로부터 신지식농업인상을, 2003년에는 대통령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신제품 개발과 생산 공정 자동화 등으로 2009년은 44억원, 2013년에는 49억 원으로 2008년 이후 2013년까지 5년 동안 약 20%의 매출 성장을 이뤄냈다.

난관을 이겨내고 한과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열정 쏟아

그동안 위기도 있었다. 지금의 포천공장으로 확장 이전한 후인 2001년, 원재료 창고에 큰 화재가 났다. 이 화재로 6억원 이상의 손실을 봤다. 하지만 피땀어린 투지로 직원들과 함께 단기간 내에 원재료 창고를 재건했고 한과 제조를 다시 시작했다. 
 
제3차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2000년 10월) 만찬 디저트 선정을 목적으로 개최된‘한국전통식품 세계화를 위한 품평회’ 출품을 준비 때도 뜻밖의 위기와 마주했다. 밤낮 없이 노력해 만든 작품을 가지고 이동하던 중 누적된 피로로 잠시 졸음  운전을 하면서 자동차 충돌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사고 현장에서 급히 한과를 들고 나와 간신히 출품 접수를 했다. 그 작품은 한과부문 금상을 수상해 제3차 ASEM 공식 디저트로 선정됐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과 수출이 확대된 후, 지금은 고급재료를 사용한 고가 상품이라는 고급화 전략으로 미국, 캐나다, 일본, 터키, 뉴질랜드 등지에 수출하고 있다.

 김 대표는 ‘세 살 입맛 여든 간다’는 신념으로 한과를 널리 알리고 세계적인 식품으로 만들기 위해 지난 2008년 30억원을 투자해 한과문화박물관과 교육관을 개관했다.
  
일반 성인, 청소년, 아동, 군인은 물론 미군부대 및 외국인 등  을 대상으로 한과만들기 체험은 물론 한과 전문인 양성교육, 농업고등학교 멘토링, 한과문화페스티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한과 인력 양성과 한과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또한, 세계인의 취향과 기호에 맞는 제품을 연구 개발하는 한과세계화연구소와 한과 전문인을 양성하는 한과 마이스터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목표이며, 앞으로 대한민국 한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전 세계 50여 개국을 다녀봤는데 우리 한과가 최고의 과자(디저트)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세계적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관계자도 한과는 음식이 아닌 약이라는 극찬을 하기도 했어요. 앞으로도 한과를 알릴 기회만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갈 것입니다.”

 2006년 8월부터 시작한 ‘이달의 기능한국인’ 선정 제도는 10년 이상 산업체 현장실무 숙련기술 경력이 있는 자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능인을 매월 한 명씩 선정·포상하는 제도다.


문  의:  고용노동부 직업능력평가과 이춘민 (044-202-7291),
         한국산업인력공단 숙련기술진흥팀 조성준 (032-509-1859)


첨부
상단으로 이동